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종이에 먹과 수채/08.03.06
['나무물고기' 12 - 기억하다]

괴물과 나는 폐허 도시의 동쪽으로 향하는 큰길을 따라 헤어갔다.
가끔 보이는 도로 표지판엔 내가 알아먹기 힘든 지명들이 제멋대로 박혀 있었다.
내가 방향감을 상실했는지 모르겠지만 동서남북을 알리는 표식도 틀려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방향을 계산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괴물이 웃었다.

‘큭큭 저 표지판은 그냥 도로를 도로답게 보이게 하려는 장식물에 불과해.
물은 동서남북이 별로 필요 없지.  물이 이 도시를 만들 때 이것 때문에 자기네들 끼리 의논이 분분했어.
이 도시에 있는 것 중에 땅위 도시를 닮지 않은 것은 바로 저 표지판뿐이야‘

도시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물속은 점점 어두워지고 역겨운 냄새가 진해졌다.
바닥은 온통 진득한 검은 오니들이 덮여 있었다.
손바닥만큼 큰 부유물질들이 여기저기에 떠다니고 끈끈한 점액질이 녹색 빛을 띠며 길게 풀어져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나는 미간에 힘을 모아 눈의 초점을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다.
발목에 감긴 녹색 띠를 떨쳐내기 위해 발을 강하게 뿌리치면서 괴물에게 말했다.

‘여긴 그저 절망스럽군’

‘어둠이 짙어져야 별을 볼 수 있어. 바람 부는 밤엔 별빛이 더욱 빛나지.
물속이 온통 검게 변하면서부터 자꾸만 지난날 맑고 아름답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매일 보아도 보이지도 않던 것이...
그것이 사라졌을 때에야 그것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눈부셨다는 것을 나도 알게 됐어‘

‘이 물속이 썩어서 어두워질수록 괴물 네가 기억하는 과거의 시간들은
더 눈부시게 아름다워 지겠군’

물속에 가득 떠다니는 부유물질들과 역겨운 악취 때문에
괴물도 숨을 쉬기가 힘겨운지 아가미가 많이 부풀어 올랐다.
이곳은 ‘생명’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나 권위를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모두는 절망을 훨씬 지나서 죽음의 문턱에 서성이고 있는지도 몰라’

‘큭 크윽 이젠 모두 무관심하지. 생명과 죽음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질 않아.
어쩌면 인간들은 자신의 목숨과 생명의 의미를 동일시했어.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했어.
확장이 아닌 과잉은 결국 넘쳐나서 폭발하게 되지. 스스로 자해하게 된다구.
입술은 생명을 중얼거리고  몸은 자해공갈단 같은 짓을 했지.
무엇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차이가 없어.
사람들은 차이가 없는 것엔 무관심하게 되지. 무관심!
결국 이렇게 끝나겠지?
무관심 속에서  무관심하게 끝나겠지....큭큭‘

나는 뺨에 들러붙은 진득한 부유물질을 떼어낸 손을 엉덩이에 쓱쓱 닦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까이 있었던 것은 매일 보아도 보이지 않았지.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으면 비로소 그것의 존재를 기억하게 돼‘

내 뺨에 붙었던 부유물질에 폐유가 스며들었던지 그것을 떼 냈던 손바닥에 검은 색이 묻었다.
나는 손바닥에 올라온 검은 기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에게 말했다.

‘듣고 싶어! 한 가지만 말해 줘’

괴물의 검은 눈이 어두운 물속 먼 곳을 바라보았다.
괴물 목어가 꿈꾸듯이 기억을 더듬었다.

아, 맞아! 봄이었어 이른봄.
봄물 먹은 산이 바다위에 굽이치다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소야바다 속에 담긴 하늘의 얼굴이 희디 흰 그런 날이었어.

영등바람이 겨우내내 잠자던 나무들을 흔들어 깨우면
사람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파도꽃이 하얗게 일어서는 바다로 향했어.
아침마다 희망의 색깔이 바람에 펄럭이고
바다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몸을 열었어.
그렇게 일년 삼백육십오일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사방천지에 가득하여
바다와 하늘을 한 몸으로 만들고
하늘과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고
사람과 바다를 한 몸으로 만들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소리에 맞추어 숭어들이 뜀박질 하는 것을
사랑으로 온종일 출렁이는 바다를
나는 해망산 낮은 언덕에서 내려다보았어.
나는 가슴을 설레며 그들의 사랑을 보았어.

이제 그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거야.
사랑의 열기로 가득 찼던 눈도 차갑게 식어 버렸고
연인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매끄러운 손가락도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고
그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거야.

괴물 木魚 가  그들을 기억했다
그들의 사랑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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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2 - 기억하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6:13
조회수: 2149 / 추천수: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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