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1.28

['나무물고기' 112 - 푸른 불빛]

밤하늘에 떠있는 별빛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선갑도 바다 밑에 안착했다.
쉴 자리를 찾아 피곤에 지친 무거운 몸을 내리고 한숨을 돌렸다.
멀리 동쪽 어둠 끝에서 어느새 그믐달이 돋아났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구부러진 달 주변으로 달무리가 돌았다.
우리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을 정도로 지쳐있었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신선한 바다내음이 마치 박하향기처럼 폐부 깊숙이 들어와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던 잠을 말끔히 걷어내 버렸다.
내가 뒤척이다가 엎드려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들어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곁에 바짝 누워있던 청둥이가 목을 가볍게 털면서 부리를 몇 번 쩝쩝거렸다.

저 멀리 물속 바닥에서 둥그런 불빛 하나가 봉긋 고개를 내밀더니
곧 흔들거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그 푸르스름한 불빛은 수면위에 올라서자 출렁거리는 물결에 한참을 흔들거리며
파도와 함께 놀았다.
그리고 한 길 정도 천천히 공중으로 올라채서 몇 번 쭈뼛거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서
위로 솟았다. 밤하늘에 높이 솟은 불빛이 점점 커지더니 수천수백개의 작은 불빛으로 쪼개지면서
마치 눈이 내리듯이 바다 위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바다 수면은 일순간에 밝은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수없이 많은 작은 불빛들이 출렁거리는 수면위에서 스물스물 기어 다니다가
모두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리두리 뭉치고 꾹꾹 다져지면서 다시 하나의 둥그런 불빛을 만들었다.
둥그런 불빛은 다시 봉긋 고개를 내밀듯이 천천히 밤하늘을 향해 솟았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놀란 청둥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게 모야? 이곳 물속에 우리들 말고도 누군가가 있는가봐!’

‘요즘은 저것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철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저 불빛은 인불이라고 하지. 왜 저런 짓이 가끔 벌어지는지는 나도 모른다.
모내기철에 하는 짓을 이 초가을 밤중에 하는걸 보면 저것들도 뭔가 살기 힘든가 보다.
아마 내일쯤엔 비가 내릴 징조야‘

목어는 예전에도 저런 불빛을 자주 봤던지 그냥 태연하게 말했다.
푸르딩딩한 불빛이 몇 번이고 저 짓을 똑같이 반복하더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 졌다.
어둠속 먼 곳에서 갈매기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짧게 울었다.
꽃지가 무섬증이 드는지 목어의 턱 밑으로 바짝 기어들었다.
나는 어제 풍도 바다 밑에서도 그녀가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
자꾸만 목어의 턱밑으로 그 작은 몸을 숨기는 걸 눈여겨보았다.

‘꽃지는 이 시커먼 밤바다가 무서운 모양이구나’

‘저눔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갈매기 녀석을 내가 아주 혼내줄까 보다. 괙괙’

‘아니야, 저 갈매긴 아무런 죄가 없어’

‘그러면 어떤눔이야?’

무엇이든 호기심이 많은 청둥이가 대뜸 물었다.

‘저 갈매기 보다 몸짓도 더 크고 부리도 길고 다리도 더 길고 깃털이 시커먼...
울음소리만 저 갈매기와 비슷했어‘

‘그렇게 생긴 녀석이면 가마우지 놈이 아닐까?
아니야, 검은머리물떼새 녀석일지도 몰라!’

꽃게들은 보름달이 훤한 밤이면 모두 갯펄로 올라와 한바탕 잔치를 했다.
갯펄 맨 위쪽 마른땅까지 몰려가 나문재나무, 퉁퉁마디, 함초 가지에 올라가서
집게발로 줄기를 물고 서로 그네를 타며 달맞이를 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첫 잔치를 맞이한 날 밤에 엄마와 꽃지는 다른 식구들과 함께
갯펄로 향했는데 그날 거센 밤바람에 파도가 심했다.
그러나 훤한 보름달 만큼이나 마음도 설레었다.
꽃지와 엄마는 파도에 밀려 일행들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바위섶에 도착했다.
일행들이 떼를 지어 달빛에 등을 반짝이며 놀고 있는 갯펄을 향해
바위 사이를 급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 시커먼 새가 성큼 나타나 날카롭고 긴부리로 꽃지의 등을 찍었다.
엄마가 달려들어 집게발로 그 시커먼 새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새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더니 꽃지를 놓아두고 엄마를 부리로 물어서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엄마는 넘어져 바르작대면서도 한쪽 집게발을 쩍 벌려 시커먼 새에게 위협을 하고
다른쪽 집게발로 꽃지를 바위 틈새로 밀어 넣으면서 외쳤다.

‘꽃지야! 빨리 바위 좁은 틈새로 깊숙이 내려가 몸을 숨겨라!
엄마를 돌아봐서는 절대 안돼...’

꽃지는 구멍이 크게 뚫린 등깍지를 끌고 좁은 바위 틈새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깥에서 다시 엄마의 몸이 내동댕이치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새의 부리가 몇 번이고 강하게 찍어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꽃지는 등깍지에 뚫린 상처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가
한밤중이 훨씬 지나 밀물이 들어와 몸을 흔들자 깨어났다.
바위 틈새를 기어나와 엄마를 찾았으나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밀물에 거친 파도만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갯펄엔 이미 바닷물이 가득 들어와 하얀 파도가 가득했다.
그녀는 등깍지의 상처를 끌고 비틀대며 갯펄 해안을 돌아 조그만 모래톱을 넘어서
소야바다로 들어왔다.
우리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점점 심하게 곪아가는 등깍지의 상처를 보듬고
소야바다에 숨어 살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끝낸 꽃지가 훌쩍이며 서럽게 울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청둥이의 옆구리를 슬며시 찌르자
꽃지의 이야기를 듣고 멍하게 있던 청둥이가 날개를 펴서
꽃지를 덮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일 내 오른쪽 날개를 찾으면 맨 먼저 그 시커먼 새를 찾아가 당장 혼내주고
그녀석이 서해바다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쫓아 버릴거야!
내가 이 밤바다를 두고 맹세 한다구! 괙괙‘

목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무척 보고 싶겠구나.
그러나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어느 누군들 장사가 따로 없단다.
저기 홀로 밤하늘에 떠 있는 달도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는구나.
태어나면서 죽음이 기다리고, 만나면 곧 헤어진다.
달도, 별도, 해도 모두 그와 같은 길을 간다.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지를 만난 우리는 지금 기쁘기만 하구나‘

꽃지는 청둥이의 포근한 날개 밑에서 마음을 안돈했다.
또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청둥이가 날개를 더욱 단단히 여며서
꽃지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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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12 - 푸른 불빛]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11 11:38
조회수: 1927 / 추천수: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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