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9.01
['나무물고기' 58 - 꺼내다_ 목어내력 16]

그날 밤 차향이 절간 골짜기에 은은하게 깔리고, 주지스님과 그의 스승이 나누는 낮은 이야기 소리가
밤새 내내 바람을 타고 들려왔어.
그 두런거리는 이야기 사이로 물을 끓이고 차를 따르는 소리는 바로 그 청년의 손길이 분명했지.

다음날 아침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그 청년이 나에게 왔어. 그는 내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어른 넓적다리만큼 굵은 두 번째 가지를 손으로 오랫동안 만져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벌려 몇 번이고 재어 보았지.
한 뼘, 두 뼘.... 다섯 뼘.
그리고 내가 서있었던 자리에 남아있는 나의 뿌리 둥치가 박혀있는 땅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뭐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아마 천지신명에게 나의 몸을 잠깐 빌려달라는 이야기 같았지.
그의 뼘으로 잰 나의 둘 째 마디 중간 대목은 내 몸 중에 아직까지도 기운이 가장 몰려 있는 부분이었지.
큰 톱으로 썰어서 다섯 뼘을 떼어 내어 어깨에 메더니 곧장 절간으로 올라가 새로 지은 요사채 뒷마당에 부려놓았어.
그의 까만 눈이 나의 몸에 이리저리 선을 긋듯이 눈대중을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빙긋이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이 나의 몸을
조용히 쓰다듬었어.

자귀와 칼로 조심스럽게 나의 몸을 다듬어가기 시작했지. 쇠붙이가 나의 몸을 파고 들어오니 처음엔 긴장했지만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신기하게도 금방 편안한 마음이 되었어.
자귀로 내 몸의 모서리와 앞뒤쪽을 가볍게 찍어 군더더기들을 떼어내고 나서 칼로 나의 몸을 깎아내었어.
내 몸을 깎아내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는데, 내 늙어빠진 몸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것은 내 몸을 깎아내는 소리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의 칼을 받아 먹는 소리였어.
그의 손에 쥔 칼의 결에 그의 숨을 싣자, 내 몸이 원래 갖고 있던 숨결이 되살아났어. 이 세 개의 다른 숨소리가
하나의 새로운 숨결을 만들어 내니, 나는 그의 칼질보다 먼저 내 몸을 미리 열어 그의 칼날이 내 몸에 바람처럼 스며들게 했어.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어.
나는 세상에 떠도는 온갖 소리들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지. 한줄기 아름다운 소리를 쫓아서 한없이 헤엄쳐 가다가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만나  나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한정 없이 가라앉았어.
내 몸이 밑으로... 천길 만길 밑으로 아무리 가라앉아도 바닥에 닿지 않자 갑자기 그 공허함에 가슴을 떨면서 어느덧 꿈에서 벗어났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마치 소나무 속에 수 천 년째 들어가 숨어 있던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꺼내어 지듯이
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방금 건져 올려진 한 마리 목어였어.

그가 봇짐을 풀더니 몇 가지 물건들을 꺼내어 아교는 끓이고 안료는 물에 녹여서 내 몸에 색을 올렸지.
그리고 삼줄을 꽈서 나를 작은 절간 오른쪽 처마 밑에 매달았어.
그가 텅 비어있는 내 뱃속에 엄지손가락 굵기의 작은 막대기를 넣고 조심스럽게 흔들었지.
‘따그르르르, 딱 땅따르 땅따르 딱 따르르르르’
난 그가 막대기로 내 몸을 울려서 내는 그 소리의 뜻을 알 수 있었어.
딱 딱 딱따그르르.... 천지신명이여, 잠시 저에게 빌려준 당신의 몸으로 단촐한 소리를 만들어
다시 되돌려드리나이다. 딱따그르르 딱 따그르르....

내 몸에서 울리는 청아한 소리는 늦은 봄 저녁 언덕 아래로 멀리 멀리까지 퍼져나갔지.
내가 소리를 내는 나무물고기 목어가 된거야.
木魚!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는 그 두 사람과 배웅하는 주지스님이 절간 처마에 매달린 나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어.
특히 그 청년의 스승이 나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믿음직한 제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예의 밝은 표정으로 말했어.

‘아직도 급한 성정이 남아있는 너의 손끝을 이 木魚가 아주 차분하고 예쁘게 받아냈구나’

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주지스님도 한마디 거들었지.

‘허허. 너의 칼질이 마치 물을 베는 것과 같아서 부드럽게 실리기도 했지만,
칼날에 들어있는 너의 망설임을 저 木魚가 더욱 편안하고 예쁘게 받았어.
칼을 쥔 너 보다 칼질을 받은 木魚가 한 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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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58 - 꺼내다_ 목어내력 16]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1:23
조회수: 1896 / 추천수: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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