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7.29
['나무물고기' 60 - 하얀세상이 되다]

목어의 긴 이야기에 빠져 있는 동안에 물속엔 이미 달이 돋아 벌써 서너 길 높이에 솟아 있었다.
물속 세상이 달빛을 받아 모두 하얗게 변했다.
거무스레하게 썩어가는 물도 하얗게 변했다. 인간들이 흘려보낸 욕망의 찌꺼기가 쌓여 만든 검은 바닥도 하얗게 변했다.
목어도 청둥이도 나도 모두 흰빛을 뒤집어 쓴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숨을 들이키면 저 하얀색이 입속으로 빨려 들어와 몸속까지 온통 하얗게 물들어 버릴 것 같았다.
구백년을 거슬러 올라간 목어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온통 하얀 세상을 보게 되니 시간과 공간감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청둥이는 여전히 목어의 얼굴에 자신의 몸을 기댄 채 코를 크게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의 몸도 몹시 피곤했지만 목어의 이야기와 하얀 달빛 탓인지 잠이 사라져 버려 오히려 정신이 총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엎드려 턱을 괸 채 하얀 달을 바라보면서 꿈속에서 방금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우지와 김무장의 아들, 아니 월명의 아들.... 안기 땅으로 간 그 화원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조차 하얗다.

‘그 후 들려오는 소문엔 그가 안기 찰방으로 재직하면서 어렸을 적 소야바다 군자만에서 보고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내
스물다섯 장의 그림을 그려 화첩으로 엮었는데 사람들은 그 그림을 속화라고 불렀어.
그가 어린 시절에 군자만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그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고 했어.
그는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놓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라고 훗날 사람들이 말했지‘

목어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도 하얗게 들렸다.
방금 목어가 말한 그림들을 내 기억 속에서 뒤져내어 하얗게 떠올렸다.
완강하게 꽉 짜 맞추어진 기억들 사이로 달빛의 하얀 기운이 스며들면서
그동안 파편화되어 화석처럼 굳어진 기억들이 파르르 떨며 서로 적당한 여백을 두고
자신들의 짝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의 기억은 장소를 찾아 움직이고 위치의 기억은 자신이 존재했던 시각을 찾아 유동했다.
그것들이 서로 움직일수록 기억과 기억 사이에 스며든 하얀색이 더욱 빛을 냈다.
목어가 거듭 하얀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 꿈꾸듯이 말했다.

‘뒷날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떤 사람들은 해망사 처마에 매달려 있는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도 알 수 없는 이런 말을 했어.
그가 그린 그 속화들 중에 서당을 그린 그림이 있다는데 훈장에게 꾸중을 듣고 되돌아 앉아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 모습이 꼭 나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풍물을 잡은 잽이들에 둘러싸여 춤추는 무동을 그린 그의 그림도 있다는데, 바로 그림 속 무동 얼굴이
내 얼굴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어‘

나는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목어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면서 목어가 말한 그림들을 떠올렸다.
그 그림속의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하얗게 들리고 그들의 표정과 깔깔 웃는 모습들이 하얗게 보였다.
아이가 훈장 앞에서 등을 돌려 앉아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도 하얗게 들렸다. 무동의 춤을 재촉하는 삼현육각이 울리는
풍악도 하얗게 소리를 뽑아내고 무동이 오른발을 껑충 들면서 긴 소매 자락을 힘껏 휘돌리는 신명나는 얼굴도 하얗게 달떴다.  
종이위에 세필을 움직여 그들을 그림에 담는 그 화원의 눈도 하얗게 빛났다.
그 화원도 하얀색이 주는 적막감을 더듬어 그들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을 서로 하얗게 겹쳐가면서, 그가 그려놓은 사람들 곁에
자신이 앉아 있거나 그림 속의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그의 붓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몸을 하얗게 열어 놓았다.

소야바다 군자만 형도 앞물 목살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어부들과 사리포구 주막집을 거쳐 화정천변에 주욱 들어선 대장간들,
봄이면 광덕산과 수리산 사이 너른 들에서 쟁기질 써래질을 하던 사람들이, 가을이면 흡족한 얼굴로 벼타작을 하는 모습이며,
와리 뒷골 빨래터를 기웃거리는 한량과 아이들의 장난끼 섞인 응큼한 눈길이며
신행오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과  원당포구에서 대부 진두를 건너는 나룻배에 몸을 실은 사람들,
장터를 찾아 오고가는 수많은 행상들의 모습이......그의 기억 속에서 하얗게 되살아 났다.
그의 입에서 길게 내쉬는 숨소리에 습기가 가득했다.

오늘.... 나는 오늘 낯설은 땅에 잠깐 앉아 있으나,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하얀 기억 속에서 다시 새로운 기억이 일어났다.  그가 열일곱 살에 해망산 목어를 만들 때 어렸을 적에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목어의 얼굴에 하얗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목어의 얼굴이
문득 나타나 지금 그가 그리고 있는 사람들 얼굴 속에 다시 하얗게 스며들었다.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 속의 사람들이 그에게 자꾸만 말을 건네며 거듭해서 물었다.

그대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여,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화원의 눈빛도 하얗고 그의 세필이 그려내는 사람들의 얼굴도 하얗고 그의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도 하얗다.
기억 속의 기억, 또 그 기억 속에서 다시 돋아나는 기억, 기억과 기억이 만나서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도 모두 하얗다.
그림 속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엔 그간 세월의 아픔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지난 어린 시절 그 세월이 자신의 몸 안에 깊숙이 몰래 감추어 두었던 하얀 슬픔을 불러 왔다.
붓을 긋고 있는 종이 위에 하얀 눈물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가 지금 있는 곳도 하얗고 그가 앞으로 가야할 길도 하얗다.
그림 속의 사람들이 떠도는 곳도 하얗고 그들이 가야할 세월도 하얗다.

나는 기억과 기억의 파편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끝없이 생성되는 하얀 빛이 목어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혹여 그 하얀빛이 목어의 얼굴에서 사라질까봐 아주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맞다 맞어! 너의 얼굴을 다시 보니 그 그림 속 무동의 얼굴과 똑 닮았다 닮았어.
아니야! 훈장 앞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더 닮았다.
아니? 그렇담, 진짜 널 깎아서 목어로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그 화원이라는 말이여?
화! 이게 어떻게 된거야? 어..... 맞어! 그림 속 그 아이의 얼굴이 너의 얼굴을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어!‘

나는 기억 속의 그림들과 목어의 얼굴을 자꾸만 번갈아 대조하며 겹쳐 보았다.
그림 속의 그 아이와 목어의 얼굴은 너무 정확히 하얗게 겹쳐졌다.
이때 곤하게 자고 있던 청둥이가 갑자기 고개를 바짝 치켜들더니 눈을 질끈 감은 채 큰소리로 외쳤다.

‘안돼! 괙괙괙! 뭐라고? 목어 아저씨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말도 안돼! 괙괙... 아저씨...’

말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청둥이가 긴 주둥이를 목어의 얼굴에 비비더니 다시 코를 푸르르 푸르르 골며
금방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잠꼬대였지만 깊은 잠 속에서도 목어의 긴 이야기를 대목대목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물속에 하얀 세상을 만들고 있는 투명하게 빛나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와 나의 모호한 경계, 이것과 저것의 어찌할 수 없는 경계가 사라지고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하얀 백색의 세상이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절대 고집하는 직선적인 시간관도 하얗게 붕괴 되었다.
생명과 무생명의 본질도 사라지고 존재와 부재, 선과 악의 분별점도 사라졌다.
우리는 달빛이 주는 이 성스러운 광경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묵이 길었다.
이 침묵이 기나긴 세월이 갖는 인간사의 연줄을 말없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물속에서 돋은 달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달빛은 물속이 품고 있는 작고 미세한 소리들마저도 모두 하얗게 만들었다.
하얀색과 흰색 사이의 그 여백에 숨어있는 모든 다양한 색깔들 까지도 모두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소리와 소리사이에
숨어있는 정적을 한정 없이 확대시켜 침묵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하얀 빛이 일으켜 세우는 침묵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일망무제의 길을 만들었다.

물속에 가득 내리는 하얀 달빛이 완벽한 상태로 충만한 침묵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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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60 - 하얀세상이 되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1:46
조회수: 1895 / 추천수: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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