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9.08
['나무물고기' 61 - 벽은 살아있다]

‘기상! 괙괙괙! 모두 빨리 일어나서 출발 준비!’

먼저 일어난 청둥이가 목어와 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어제 늦게 잠들었던 탓에 나는 다시 웅크리고 누워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여 두려고 버텼다.
청둥이가 날개로 내 엉덩이를 내리 치면서 나를 깨웠다.

‘괙괙괙! 그만 일어나!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먹는다!’

나는 무릎을 잡아당겨 더욱 웅크려 모로 돌면서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흐 그 맛있는 벌레는 너나 몽땅 먹어라!....나는 벌레를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늦게 맨나중에 일어날 테야’

청둥이가 주둥이를 나의 귀에 대고 마치 따발총을 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모라고? 얼마나 견디나 보자! 괙괙괙 꽥꽥꽥 꽤액! 꽤액!’

벌써 해가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 물속은 어제 보다 더 어두웠다. 하루 동안의 그 시간만큼 물속은 급속도로 썩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 청둥이가 앞장선다. 썩은 물 때문에 시계 확보가 어렵다. 남은 둘은 멀리 처지지 않도록 내 뒤를 열심히 따라 올 것!’

청둥이가 마치 원정대의 대장이라도 되는 듯이 단호한 말씨를 보이며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오른쪽 날개가 없는 탓에 왼쪽 날개로만 헤어가니 몸이 자꾸만 오른쪽으로 향했다.
목을 오른쪽으로 주욱 내밀고 그의 노란 물갈퀴 발이 왼쪽 물을 잡아 당겨서  
몸이 오른쪽으로 밀리지 않고 앞으로 향하도록 갖은 애를 썼다.
청둥이의 헤엄치는 모습이 여간 부자연스러웠으나 힘들다는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열심히 나아갔다.

도시의 긴 담벼락을 따라서 벌써 두 바퀴째 돌며 살폈지만 물속 도시로 들어가는 통로나 문은 흔적조차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한 바퀴를 돌 때는 도시의 둘레가 대략 장방형으로 약 20리쯤 되어 보였다.
두 바퀴째는 약 10리가 더 불어나 30리쯤으로 그 길이가 늘어났다. 멀리서 볼 때는 마냥 허술한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그 벽을 열고 들어가려고 접근을 하면 벽은 다시 길이와 높이를 더하여 견고해 졌다.
벽은 살아 있었다.

어젯밤 잠이 부족한 탓에 목어와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앞에 가던 청둥이가 우리를 돌아보며 이제야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어제 꿈속에서 청둥이는 칼을 든 무사가 되어 수많은 괴물들과 싸웠지.
북쪽 어디에서 서해를 돌아 수많은 뻘건색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서울 한강에 배를 띄운 푸른색깔 괴물들이 새까맣게 이곳 소야호를 향해 쳐들어 왔어.
동해에서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꺼멍색 괴물들도 엄청났지.
남쪽에서 제주도 추자도 흑산도 하의 장산 비금 도초 암태 압해 자은 칠산도를 지나
비안 선유 어청 안면도 덕물도 풍도 선제 대부 제부도를 휩쓸어 버린 누리끼리한 괴물들이 소야호로 마구 마구 날아왔어.
으하! 괴물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죄다 죽이고, 죽어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웠어.
괴물들이 지나간 자리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남아 난 것이 없었지.
겁이 많은 인간들은 그 괴물들 앞에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어. 겁쟁이들!
그래서 청둥이가 칼을 별러 괴물들과 맞서 싸웠는데  대장인듯한 보라색 괴물의 왼쪽 눈을 찔러 제압하자
남은 쫄따구 괴물들이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지.
아! 그때, 나 청둥이는 너무나 늠름했어. 나는 칼을 높이 들고 날아가 소야호 우음도 앞바다에 유유히 내려앉아
나의 깡총한 짧은 꼬리깃을 우아하게 탈탈 털었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 아항! 그런데,
해망산 언덕빼기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슬피 울며 죽었는데 그녀의 혼불이
마치 긴 명주수건처럼 풀어져 너울너울 바람에 날려서 하늘로 올라갔지.
그리고 누군가 그림을 그렸다. 인간들이 하는 짓 가운데 가장 모자라는 짓이 그림 그리는 일인데 뭘!
왜 인간들은 그 딴 짓을 하는지....원!  인간들은 왜 그리워하는 일을 자꾸만 만들까.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인간아!. 바보 같은 인간아! 바보! 바보!
그런데 목어아저씨가 왜 하필이면 그림 속으로 들어갔을까. 왜 그 좁은 곳으로 들어갔을까.
목어아저씨도 바보! 분명히 어떤 몹쓸 인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림속으로 들어갔다니까!
목어아저씨의 크고 둔한 몸이 겨우 손바닥만한 그림 속으로 우겨 들어가다니.... 아마 그 그림은 다 엉망진창
난장판이 되었을 거야. 하이고!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될대로 되라지 뭘!
어젯밤 꿈은 너무 복잡해서 난리법석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보라색 대장괴물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나 청둥이의 모습이
가장 빼어나게 멋있었어'

목어와 내가 눈을 마주치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어젯밤 목어의 길고 긴 이야기를 청둥이는 곤한 잠 꿈속에서 비몽사몽 절반은 흘리고 남은 절반은 귀에 담았던 것이다.

도시의 벽이 견고해질수록 물속엔 더 큰 외로움이 찾아왔다.
물속은 이 외로움 때문에 더욱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썩기 마련이다.
나는 저쪽 언덕아래서 잠시 물속도시를 조망하며 도시로 들어가는 통로를 가늠해 볼 겸 잠깐 쉬어가자고 말했다.
쉬어가자는 내 말에 청둥이가 더 좋아했다.

언덕아래 도착한 청둥이가 두리번거리더니 약간 옴팍한 자리를 보고 그곳에 몸을 던지듯이 급하게 앉았다.
청둥이도 몹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왼쪽 날개 하나만으로 약 50리를 헤엄쳐 돌아 왔으니 그가 가장 피곤했을 것이다.
우리는 쉴 자리를 잡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잠깐 눈을 감았다.
검게 썩어가는 물속과 잠 속의 경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던 차에 청둥이가 다시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요 소린 또 모야? 바로 이 밑에서 뭔 소리가 들리는데.... 파도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청둥이가 납작하게 엎드려서 여기저기 바닥에 귀를 갖다 대며
골똘한 표정으로 바닥으로 부터 올라오는 뭔 소리를 들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바닥에 귀를 대고 눈을 깜짝이던 청둥이가 눈을 치켜 뜨고 고개를 바짝 쳐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확실해! 요 밑에 또 다른 바다가 있는가봐! 누가 믿거나 말거나, 내 발 밑에 다른 세상이 존재해! 파도소리가 확실해’

목어가 자신의 무거운 몸을 바로 잡아 청둥이가 말한 그 소리들을 확인하고 나서
좌우를 몇 번 두리번거리며 살펴본 뒤 말했다.

‘우리가 쉬고 있는 뒤편 언덕이 저울섬 형도衡島의 아랫자락이라면, 우리가 앉아 있는 바닥 아래서 들리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는
바로 마고의 길에서 울리는 소리다. 이 바닥 아래가 마고의 길이 분명해’

'마고의 길'이라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엉! 마고할미가 여기까지 와서 길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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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61 - 벽은 살아있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1:55
조회수: 2020 / 추천수: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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