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8.20
['나무물고기' 47 - 칼을 보다_ 목어내력 05]

잠시 후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말발굽소리를 둘러싸고 수명의 발자국 소리가 오른쪽에서 달려왔다.
그들이 달려와 오른쪽에서 앞쪽까지 빙 둘러 진을 쳤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병들의 얼굴도 몇몇 어둠속에서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중 한 녀석은 내가 훈련도감의 예도장 사범으로 있을 때 나에게 검법을 배웠던 별무사 출신이다. 그의 아비가
한양 인근에서 유명한 대장장이 검장 판술 영감이었다.  
내가 품에 안고 있는 이 칼도 그의 아비가 정성을 다해 소중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녀석이 내 눈길을 애써서 피했다.

원래 나는 칼 모양새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훈련도감 병고에 있는 아무 칼이나 내어서 그때그때 적절하게 사용했다.
어영청이나 금위영 소속의 상급 무사 정도 되면 모두들 자신의 칼에 꽤 많은 돈냥을 투자했다.
어떤 무사들은 자신이 직접 대장간에 가서 칼을 벼리기도 하고, 손잡이와 칼집에 여러가지 장식들을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 나에게 최초로 검법을 가르쳐준 스승은 칼에 모양새를 내는 것을 가장 금해야 할 일이라 일렀다.

어느 날 훈련도감 병고에 쌓여진 무기들을 보수하러 판술영감이 도감영내에 들어왔다가
내가 별무사들 앞에서 검술시범 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시범이 끝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의 수건을 벗어 땀을 닦고 있을 때
그가 내게 다가와 자로 재 듯 나를 몇 번 훑어보더니  내 오른손을 안팎으로 돌려가면서 요모조모 살펴보고 나서
아무 말도 없이 병고로 들어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훨씬 더 지났을까, 그의 아들을 보내서 나에게 잠깐 다녀가라는 기별이 왔다.  
도감 일을 끝낸 후 집으로 들어가 저녁밥을 당겨 먹고 광희 남소문을 지나 두무개 길목에 있는 그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서 사위에 어둠이 깔리고
서쪽으로 보이는 목멱산 자락을 비껴나 눈썹 같은 초승달이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한 다음에 그의 대장간에 들어서자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하던 판술영감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시렁을 몇 번 더듬더니 꾸밈이 없이 단정하게 생긴 칼 한 자루를 내 주었다.
주저하는 나를 보고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자네 몸과 손을 대중하여 내가 오랜만에 제대로 한 번 만들어 보았네.
그리고... 자네의 검법을 두어 번 유심히 보아 둔 기억으로 칼의 두께와 넓이 그리고 곡을 가늠했네‘

나는 칼을 받아들고 대장간의 뒷마당으로 나가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날밑 코등막이가 없이 칼집과 자루가 민짜로 뻗으며 곡을 만들어 냈다.
칼집은 참죽나무에 담묵으로 칠을 한 뒤 동백기름으로 닦아 냈고
자루는 마를 꼬아 짙은 쪽물을 들인 끈을 홀치기로 감아 단순한 모양을 냈다.
칼을 천천히 빼 들었다. 칼집에서 빠져 나온 칼날이 미세한 진동으로 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도감의 예도에 비해 반 뼘 정도 짧고 두께도 약간 더 얇았다.
나는 예도에 손이 능숙해지자 언제부터선가 조금 더 짧고 폭과 두께가 조금 더 얇은 칼을 찾았지만
도감이나 금위영의 병고에서 그런 모양의 예도나 환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영감이 도대체 내가 예전부터 원했던 칼을 어떻게 알아서 이렇게 맞춤한 칼을 만들 수 있었을까.

칼을 쥐고 앞을 향해 비스듬히 세우자 초승달이 칼끝에 걸렸다.
칼날 주위로 엷은 하얀 칼무리가 서렸다.
손에 가볍게 들린 칼자루가 낯설지 않게 손바닥에 안겼다.
칼이 가늘게 떨며 우는 소리를 손바닥으로 들으며 칼날 속에 내 몸을 천천히 들여 놓았다.
예리한 칼날이 부드럽게 내 몸을 싸 안았다.
칼끝에 걸려있던 초승달도 칼날 속에 스며 들었는지 혹은 이미 목멱산 자락 너머로 숨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까지도 칼은 웅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뒤에서 판술영감이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이게 내 생에서 마지막 칼이네. 이젠 나도 늙어서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농사일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주기에도 내 몸이 성찮네. 하나 뿐인 아들 녀석이 이 일을
이어 받았으면 하네만 저 눔은 허구헌날 딴 생각만 한다네 그려.
모든 것엔 주인이 따로 있어. 이 칼이 주인을 제대로 만났길 바라네‘

내 주위를 거의 두세 겹으로 에워싼 살수들의 병장기들이 어둠 속에서 희번득 거리며 괴이하게 보였다.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된 판술영감이 저 어둠 건너편에서 그가 만들어 준 칼을 가슴에 안고 있는 나의 마지막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만들어 준 칼의 진정한 주인이 되질 못했다.
내가 칼을 쥐고 다니듯, 칼이 나를 끌고 다니듯 이런 세월이 지금까지 반복 되었던 것이다.
조정 권부나 도고상들의 개 노릇을 위해 그동안 내 칼은 수없이 많은 획을 그었다.
판술영감의 얼굴이 머물던 자리에 문득 스승의 얼굴이 보였다.
스승께서 잠들어 있는 땅이 여기서 지척이었지만 십년도 넘게 찾아뵙지 못했다.
오랜만에 스승이 나의 심중을 열고 들어왔다.

스승님 제가 참으로 못났습니다.

그래, 네 못난 것을 이제야 알겠더냐. 그러나 서러워 마라.
네가 가진 그릇만큼 살다 가느니....네가...그동안 너의 칼끝에 이슬처럼 사라진 수많은 목숨을 이제 다시 만날 때가 되어가는 구나.
칼 너머에 보지 못했던 세상은 또 다음 사람이 깨달아 이루나니...

겨울밤 갯가 찬바람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목덜미에 서늘하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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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47 - 칼을 보다_ 목어내력 05]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8:26
조회수: 2015 / 추천수: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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