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8.27
['나무물고기' 50 - 미투리를 보다_ 목어내력 08]

빙 둘러선 사병들이 세찬 갯바람 소리마저 잊고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치호가 등채를 손바닥에 마주치면서 흡족한 듯 말했다.

‘역시 그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구나. 천덕기의 협도를 단 첫수에 절명시키다니.... 그러나 김무석이 너도 죽기 전에
그 작은 칼솜씨 따위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말을 마치고 자기 수하들을 한번 휘둘러 본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로 옆에 있던 왜무사를 바라보았다.
왜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른 침을 삼키면서 모래를 발바닥으로 쓸듯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김무석이 낮은 자세로 웅크려서 어깨에 대고 있던 칼을 옆으로 짧게 두어번 흩뿌려 칼날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피를 털어냈다.
그가 자세를 바로 잡고 오른손을 내려 칼끝을 아래로 향해 쥔 후 왼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뽄 나라떼 미마쇼오‘

왜무사가 그를 향해 간단하게 뭐라고 한마디 하며 목례를 한 뒤 뒤돌아서서 고개를 들어 바다 건너 밤하늘의 먼 끝을 잠깐 바라보았다.  
허리에 감은 칼 끈을 풀어 작은 칼을 칼집 채 모래에 박아 놓고 긴 칼을  왼편 옆구리 허리띠에 질러 여몄다.
그리고 미투리를 조심스럽게 벗어서 나란히 두고 감발만 한 채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왜무사는 비어있는 양손을 모두 내려뜨리고 김무석도 역시 칼을 든 오른손을 내려뜨려 둘이 서로 조용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왜무사들은 대부분 저렇게 정중한 태도로 야투에 임했다.
그리고 싸움의 어느 대목까진 정수를 쓰다가 자신의 검법이 상대방에게 먹혀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암수로 표변한다.
왜무사가 먼저 두 발짝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딛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정확하게 그의 발과 왜무사의 발은 아홉자 거리였다. 이미 칼을 빼어 들기만 하면 서로 치명적인 공격거리 안에 가두어진 것이다.
그런 상태가 상당히 길게 유지되었다.
김무석이 왜무사를 바라보던 눈빛을 거두어 왜무사의 뒤편에 방금 벗어놓은 그의 하얀 미투리를 바라보았다.
모래밭 위에 덩그마니 놓여진 미투리 한 쌍이 무척이나 외롭게 보였다.

그가 젊었을 땐 왜구 토포전에 많이 차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도감의 별무사직을 그만 둔 뒤로도 바다건너 찾아온 왜무사들과
많은 결투를 했던 터라서 왜검법을 소상히 잘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왜의 몇몇 밀상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왜의 칼날은 길고 강하다. 강할 뿐만 아니라 섬세하다.
내 손에 쥐어진 조선검은 통쇠를 그대로 담금질해서 만드는 반면에
왜검은 안쇠에 바깥쇠를 돌려 싸안은 뒤에 담금질을 한다. 그래서 강하면서도 가볍다.
어지간한 충격에도 부러지는 법이 없다.
젊은 날의 왜구 토포전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서로 접전을 벌이게 되면 왜구들의 칼은 상대방의 몸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쪽 병사들의 손에 쥔 칼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러 먼저 병사들의 칼날을 부러뜨려 놓았다.
그 뒤로는 왜무사들과 접전을 할 경우엔 그들이 휘두르는 칼을 받아치지 않았다.

왜무사가 왼손으로 천천히 허리띠에 여며진 검의 칼집 중둥을 잡고 앞쪽을 향해 빼어내며
재빨리 오른손이 칼자루를 잡아당겨 눈부시게 하얀 칼날을 빼냈다.  왼손에 쥐어진 빈 칼집을 옆으로 던진 뒤
오른손 아래 칼자루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이내 맹호은림세로 칼날을 오른쪽 어깨 안쪽으로 감싸 안았다가
칼끝을 튕겨내듯이 직진하여 그의 이마를 향해 파고들었다.
무섭게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첫 일격은 살의가 없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알아보려는 공격에 불과했다.
김무석이 앞으로 반보를 움직이며 몸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간략한 몸짓만으로 왜무사의 첫 일격을 흘려보냈다.
그는 아직도 오른손을 옆으로 내려뜨린 채 칼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 엇갈리면서 언뜻 본 왜무사의 얼굴은 먼발치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앳되어 보였다.

뒤돌아선 왜무사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칼끝을 수평으로 길게 내밀며 두어 걸음 앞으로 달려오더니 곧 칼의 방향을 바꾸어
허리를 보고 베어내리다가 역으로 칼을 꺾어 위를 향해 다시 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어두운 밤하늘에 그의 칼무리가 하얗게 금을 그었다.
수평으로 내밀고 달려올 때는 첫 일격처럼 살의가 없어 보였지만 목을 향해 돌아오는 칼날은 필살세로 변했다.
나는 칼을 쥔 오른손을 길게 옆으로 내려뜨린 채  허리만 돌리면서 그의 칼을 두 번째 흘려보냈다.
이제 한 번만 더 그의 칼끝을 흘리면 된다. 이 마지막 일격은 처음부터 필살세의 칼을 날릴 것이다.

왜무사의 숨소리는 아직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숱한 왜무사들과 확실히 다른 검객이었다.
양쪽 엄지발가락만으로 모래위에 서서 그림자처럼 고요하게 움직이는 그의 발놀림이 안정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제목: ['나무물고기' 50 - 미투리를 보다_ 목어내력 08]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8:39
조회수: 2023 / 추천수: 496


day_080828_1.jpg (126.7 KB)
의견(코멘트)을 작성하실 수 없습니다. 이유: 권한이 없는 회원레벨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DQ'St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