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8.22
['나무물고기' 51 - 모래알을 보다_ 목어내력 09]

왜무사가 이번엔 천천히 칼을 자신의 머리위로 올렸다.
길고 하얀 칼날이 위에서 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듯 했다.
저 자세는 일격에 네다섯 획을 긋는 조천세 동작이다. 첫 획을 잘 피해서 그와 짧은 거리를 확보하면
뒤에 따르는 획은 쉽게 흘려보낼 수 있다.
고개를 천천히 오른편으로 돌리며 그의 눈을 피해 다시 나의 발등 앞 모래 위를 향해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진 칼을 옆으로 들어 올려 칼날이 땅과 수평이 되도록 했다.
그 자세로 두 호흡을 멈추었다가 땅과 수평을 유지한 채 아래를 바라보던 칼날을 그 위치에서 손목만 급하게 돌려 앞으로 향했다.
그가 내 자세에 속았다. 그가 공격의 선점을 뺐기지 않기 위해 첫 획을 나의 머리위로 무겁게 날렸다.
아래로 휙 내려친 칼을 다시 회수하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회수하자마자 칼이 수평으로 나의 명치끝을 파고들었다.
그의 칼질은 짧고 간략했다. 그의 칼끝이 나의 어깨 옆으로 세뼘도 지나기 전에 곧바로 빠져나가더니 다시 옆구리 쪽으로 들어와
역으로 꺾어져 위로 올라갔다. 두 획이 모두 회선게로 몸을 솟구쳐 돌아서면서  굽이쳐 베어내는 사두세로 이루어졌다.
위로 치켜 올라가는 그의 칼끝이 나의 상투 왼쪽을 스치며 한웅큼 베어 먹었다. 곧 왼쪽 이마로 머리카락 몇 무더기가 흘러내렸다.
공격한 칼을 회수하는 속도는 물론 저렇게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는 장검의 방향을 마음먹은 대로
틀거나 굽이치는 검 획을  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손목 힘이 강하다는 것이고 평소 훈련량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칼날을 내어주지 않은 채 그의 일격 다섯 획을 모두 고스란히 몸동작으로 흘려보냈다.

왜무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연이은 공격으로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미 절반이 끝난 싸움이다.
이젠 그와 나의 간격이 열자를 넘어섰다. 그도 더 이상 공격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앞으로 칼을 내밀어 수세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그의 발끝 움직임과 칼날의 각도가 변했다.  
그의 검세는 내리 세 번의 공격에 사용했던 천유류에서 운광류로 옮겨가고 있었다.
왜검범의 운광류는 품과 품사이의 여백마다 반 호흡이 더 얹어져 암수를 숨키기에 더없이 좋은 검세다.    

나는 오른편에 땅과 수평으로 칼을 길게 내민 채 내 왼발 끝에서 두자 앞 모래만 바라보면서
그의 다음 동세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렇다. 세상 각지엔 저 하얀 모래 알갱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모래알을 유심히 보면 똑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듯이 사람들 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저마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평생을 칼에 의지를 하고 살게 되었을까. 아니, 매번 칼이 나에게 의지를 해 왔다.
나는 평소에 칼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도 하기 싫었다.  
안방에서 밤잠을 자다가도 벽장 속에 넣어둔 칼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무도 몰래 일어나서
장독대 옆 처마 밭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해 대다가 속을 진정 시킨 후에 한참이나 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앳된 왜무사는 무엇을 사자고 아직도 청청한 나이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생결단의 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것일까.
그의 가족들은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그의 앞에 칼을 쥐고 버티어선 나의 모습은 마치 야차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른손에 들린 칼에게 다시 물었다.

이것도 삶인가.

모래밭 가장자리를 쓸고 올라와 부서지는 파도 머리의 허연빛이 언뜻 칼날에 머물렀다.
칼날이 대답했다.

그동안 수많은 생목숨을 거두어들이고도 아직 죽음조차 모르는 네가 어찌 삶을 묻는가.

왜무사가 칼끝을 나의 미간을 향해 고정해 둔 채 두어 발짝 왼쪽으로 옮겼다.
바람이 금새 많이 잦아들었다. 모래밭 너머로 바닥을 쓸어가는 파도의 거친 호흡이 길게 들렸다.
김치호의 수하 중 누군가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영감님, 관군들이 도착하면 일이 낭패가 됩니다’

‘염려 없다, 여기서 신호를 보내기 전엔 군선을 대지 말라고 수군만호에게 이미 손을 봐 두었다’

왜무사가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그의 칼을 오른쪽 어깨위로 바짝 치켜 올렸다.
손아귀에 힘을 강하게 준 탓인지 그의 손매듭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잡고 있는 백원출동세는 속임수가 들어있는 자세다.
나의 눈은 여전히 내 앞의 모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움직임을 내 오른손에 살포시 쥐어진 칼이 세밀하게 읽고 있다.
이제야 나의 칼속에 숨어있던 눈과 귀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왜무사가 발목에 탄력을 주더니 오른쪽 어깨위에 칼을 치켜 올린 채로 왼쪽 어깨를 앞으로 쑥 내밀며 튀어 올랐다.
그가 나의 왼쪽 목에서 오른쪽 허리 까지 일획을 긋겠지만 정작 노리는 것은 오른쪽 수평으로 뉘어진 내 칼의 중둥을
두 번째 획에서 노릴 것이다. 허리를 뒤로 젖혀 그의 일획을 피한 다음에 왼발을 한 발짝 빼면서 칼을 뒤로 돌리며
무겁게 내려치는 두 번째 획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무거운 두 번째 획이 그냥 공중에 흩어지자 그의 안정된 발걸음이 약간 헝클어지듯 했지만
곧 칼을 회수하여 수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당황한 기운이 확연했다.
이런 야투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검 획을 미리 들키게 되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제 싸움은 거의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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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51 - 모래알을 보다_ 목어내력 09]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8:44
조회수: 2013 / 추천수: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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