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9.01
['나무물고기' 56 - 명줄을 놓다_ 목어내력 14]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잠시 꾹 눌러 참았던 그녀의 기침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계속되는 기침소리가
진정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갯가 찬바람에 덤불의 갈잎을 흔드는 소리와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섞이면서
해망산 어두운 겨울밤이 다시 팽팽하게 긴장되는 듯 했다. 잠시 후 또 그녀의 기침소리가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그녀는 김무석이가 헤어지기 전에 머리와 등에 둘러준 솜배자를 벗어서 아이 위에 덮어 단단히 여몄다.
그녀의 명줄 끝이 갯가 추운 겨울밤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겨울밤의 차거운 바람조차 느끼지 못하고 굳어지면서 차츰 눈빛이 흐려지고 간혹 정신이 가물가물 했다.
바튼 기침의 뒤끝마다 더욱 비릿한 기운이 자꾸만 목을 타고 넘어 왔다.  
그녀가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큰 솔님! 아범이 꼭 이곳을 찾아오겠지요.
그동안 혹 제가 숨을 놓더라도 큰 솔님께서 이 아이만은 부디 지켜주시오.

그녀는 정신이 흐릿해질 때 마다 자꾸만 풀어지는 어깨를 추스르며 아이를 안은 손깍지에 힘을 주었다.

그래, 아범은... 그이는 꼭 나를 찾아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이의 어깨 위엔 항상 죽음이 매달려 있었지만 결국 그 죽음을 뿌리치고
언제나 나에게 돌아왔어....
그이는 이제 나와 아이를 데리고... 서쪽 너른 바다 끝 덕물도 비조봉 아래.... 남쪽으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초막을 지어..... 칼 대신 호미와 낚시대를 쥐고...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살자고.... 말했어....
그래, 그이는 아이와 나를 데리러 곧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평소 바느질할 때 마지막 땀을 뜨고 나면 꼭 두 번을 홀쳐 매듭을 진 다음 실끝을 앞니 왼쪽으로 끊었다.
가는 실끝을 자신의 입술 속 이빨 사이에 물어서 뚝 끊고나서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멀리서 김무석 그가 하얗게 웃으며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금방 사라질까봐 그녀는 재빠르게 가는 실로 한번 감아서 홀쳤다.
주위가 환해지면서 어디쯤에서 바삐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그가 언뜻 다가와 그이의 따스한 두 손을 내밀어
겨울밤 갯가 차가운 바람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뺨을 감싸주었다.
그이의 따스한 손이 자신과 아이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다시 실을 감아 두번째 홀쳐맸다.
그녀가 그동안 평생토록 바늘귀에 끼었던 실의 길이 보다 더 길고도 긴 자신의 가느다란 명줄을 입술에 살포시 물고
왼쪽 앞니로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이빨사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산 고잔뜰의 침장 명우지가 자신의 마지막 명줄 끝자락을 그렇게 놓았다.
세차게 불던 겨울밤 갯가 찬바람도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이를 품안에 꼭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속에서 하얀 띠가 천천히 빠져나와 공중에 둥 뜬 채
덤불 위에서 한참이나 머물다가 다시 크게 원을 그려 두어 바퀴를 돌더니 해망산 앞 소야바다, 감청색 어두운 밤바다 위로
너울너울 날아갔다.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은 하얀 명주 수건 같았다.

바닷가 추운 겨울밤이 그렇게 지나고 멀리 칠보산 원뜰 남쪽 자락을 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 햇살이 한두 가닥 펼쳐져 주위가 조금씩 훤해지자 간밤의 소란은 모두 햇빛에 녹아 사라져버렸다.

뒤쪽 덤불 속에서 훌쩍 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동네로 내려가던 행자승이 내 옆을 지나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덤불속에 들어가 명우지와 아이를 확인했다.
덤불속에 앉은 채 싸늘하게 굳어버린 어미의 품에서 아이의 푸른 입술이 그녀의 마른 가슴을 더듬으며 울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절집에서 스님들 몇이 뛰어왔다.
주지스님이 주위의 다른 스님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어제 야밤중에 고약한 놈들이 절간까지 들어와 난리를 치더니.... 모두 이 일에 절대 함구하고...
저 여인은 근처 양지 바른 곳을 찾아 평장을 하고 아이는 절에 들여서 우선 거두도록 해라’

그 아이는 그렇게 해망사라는 작은 절집에서 키워 졌다.
아이가 말을 떼면서부터 젊은 스님들의 염불을 흉내 내며 따라하는 그 귀여운 모습에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스님들도 그 아이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주지스님은 말했다.

‘저 아이의 생김새가 중노릇 할 녀석은 아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 속세로 내 보내야 할 텐데...‘

그 아이 네살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설날에 별망성 수군 진영 근처와 원당 성포 조깃나루 근처 객주집의 모든 기생들이
오랜만에 일손을 놓고 예불을 드리러 왔다. 설날에 찾아 나설 가족도 없는 기생들에겐 말이 예불이지 촛불 하나씩 켠다는 핑계로
동료들과 함께 해망사에 원족을 온 것이다. 그 무리엔 안산 기생들의 대장격인 퇴기 월명도 함께 왔다.
퇴기 월명은 기생문을 닫은 후의 삶이 워낙 반듯해서 인근의 기생들에게 존경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이태 전에 그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던지 월명은 틈틈이 아이의 속옷이나 풍차바지를 챙겨서 보내 주었고
오늘은 애기복건과 까치두루마기를 가져와서 아이에게 입혀 보였다. 물론 그녀가 안산땅에서 한창 기생으로
일 할 때 명우지가 그녀의 모든 옷을 도맡아 지어주고 간수를 해 주었다. 어느 누구 보다도 그녀는 명우지의 바느질 솜씨와
소박한 성품을 잘 알고 있던 오랜 지기였다. 명우지가 나이들어 김무장을 만나 혼인한다고 했을 때도 그녀가 처음엔
제일 먼저 나서서 반대했다. 김무장에 의해 명우지의 팔자가 엇나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일을 곱씹은들 무엇하리요. 각각 제 운명과 인연에 따라 맺어지기도 하고 헝클어지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하느니....
아이가 절집 사람들에게 새 옷을 자랑하러 방에서 나가자 월명이 주지스님에게 말했다.

‘저 아이가 커 갈수록 생김새는 지 애비의 모습이지만, 성정은 꼭 침장 명우지를 닮았소.
이젠 내 시간이 뜨음하니, 저 아이는 내가 데려다 키우겠소’

‘월명 보살이 생각을 잘하셨소. 저 아이가 좀 더 나이 들면 곧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할 것이외다’

다음날 그 아이는 퇴기 월명을 따라 나섰다.
월명이 절집에서 내려오다가 내 앞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고 군자만 건너편 고잔 너른뜰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말했다.

'봐라! 저기 바다 건너 너른뜰이며 포구마다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단다. 잘 봐두어라.
이제 너도 저 많은 사람들과 섞여서 너 만의 모습을 만들어가며 살아야 할게야.
이 애미 월명이는 네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껏 도와 줄 것이다. 이제 그만 저 곳으로 내려가자'

아이는 대답대신에 조막손으로 월명의 손을 꽉 쥐었다. 뒤쪽에 함께 따라오던 기생들 몇이 부러운 눈으로
그들 새로운 모자를 바라보았다. 산을 내려가면서 그 아이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나이가 늙어 힘에 부치는 큰 가지를 몇번 무겁게 흔들어서 서운한 손짓을 해 보였다.
고잔벌 대처를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하늘을 나는듯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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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56 - 명줄을 놓다_ 목어내력 14]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1:09
조회수: 2005 / 추천수: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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