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8.29
['나무물고기' 57 - 드러눕다_ 목어내력 15]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 또 세월이 흘렀다.
쌍섬 앞 소야바다 군자만의 포구들은 사시사철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수년 전 석삼년 대한가뭄으로 조선천지를 휩쓴 기근에도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활기찼다.

정축년 초가을에 큰 바람이 불었다.
바닷가 인근 마을의 지붕들이 모두 바람에 날아가서 성한 집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왠만한 나무들도 모두 뿌리 채 뽑혀 나뒹굴었다. 해망사의 작은 암자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삼백살이 훨씬 넘은 나도 벌써 오래전부터 뿌리 밑둥이 조금씩 썩어 들어오고 있던 터에
아무래도 이번 큰바람엔 견디기 힘겨울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둘째 밤이 되면서 바람은 폭풍우로 변해 더욱 거세어 졌다.
이 바람을 견디어 내기엔 삼백살이라는 내 나이가 무리였다.
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오늘 내가 그대와 함께 가야하는가?’

바람이 말했다.

‘이제 너의 세월이 끝났다.
그러나 곧 신의 손을 가진 사람이 너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이다‘

말을 끝낸 바람이 곧 바로 순간적인 힘을 나의 뿌리근처에 집중하면서 밑둥치 썩은 부분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커다란 나의 몸이
뒤쪽 덤불 위로 천천히 넘어갔다.
내 나이 삼백 이십 사살이 되던 정축년 초가을에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보고 들었던 모든 인연이 새겨진 나이테만 남긴 채  
나는 세상과 이별을 했다.
나는 세상과 이별이 서운했으나, 구백 년 전에 어느 흉칙한 수적이 이곳에 죽어 흙밥이 되기 까지 육백 년과 그의 등에
내가 돋아나서 삼백 년, 모두 구백년의 업장이 이제사 소멸을 하여 수적의 온갖 죄업이 적멸한 곳으로 날아가고 그의 영혼이
비로소 청정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세상에 들씌워진 업장에는 천년 세월도 하잖을 뿐이었다.
세상사에서 가장 큰 일이라 할 태어남과 죽엄이 이렇듯 모두 제 나름의 이치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정축년 큰 바람에 쓰러져 덤불위에 드러누워 있던 세월도 꽤나 길었다.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안을 수 있는 굵은 둥치는 이미 단단한 껍질이 모두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고
온갖 종류의 풀벌레가 나의 몸 안에 자신들만의 둥지를 틀었다.
개미들도 떼로 몰려와 나의 몸에 난 수없이 많은 작은 구멍들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탐했다.
사람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신목이라 하여 범접하지 않았고 그 덕에 나는 자연스럽게 세월 속에 나의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어느 늦은 봄날, 떡거머리 청년을 앞세우고 이곳 주지스님이 친구 분과 함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주지스님의 친구 분은 이미 몇 번째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다.
한양성 아래쪽인 안양 화성 인근에서는 그 비범한 글재주가 소문이 자자했다.
세상에 대한 그의 해박한 재능은 한양성에까지 알려져 있는 문사였다.
원래 그의 조부와 아버지가 각각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던 명문세족이었으나 친형과 장인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벼슬길이 막히게 되니 가난에 시달리다가 수리산 아래 부곡리에 들어와 처가살이를 한지도 벌써 이십년이 넘어섰다.
지난여름에 이곳에 왔을 땐 지필묵을 준비하여 내 마른 몸 위에 걸터앉아서 눈 아래 펼쳐지는 소야바다 군자만의 풍광을 몇 장이고 그렸다.
사람들은 그의 글씨와 그림을 받으려고 한사코 먼 걸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밝은 인정이 넘쳤고 재치와 해학이 가득 담겨있었다.

세 사람이 내가 누워있던 곳에 다다르자 나는 저 청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16년 전 추운 겨울밤에 그의 애비 김무석이
저 아래 유포리 모래밭에서 마지막 칼을 그림처럼 그어 새로운 전설을 만들었다. 도추꾼들을 피해 두 모자가 나를 찾아와서
뒤 덤불에 숨어들었다가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싸늘하게 시신으로 변한 침장 명우지의 모습과 이 아이 네 살 때 퇴기 월명을 따라
대처로 내려가던 아침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아, 그 아이가 이렇게 훤칠한 장부가 되어 쓰러져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구나.
맨몸으로 누워있는 나는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월명의 손을 잡고 떠나면서 자꾸만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이 인근에서 가장 멋있는 소나무였다.
그 코흘리게 아이는 이제 훤훤장부가 되었고 나는 그의 발아래 맨몸으로 쓰러져 누워 흙으로 변할 날만 기다리는 미물이 되어 있으니
세상의 이치가 모두 이런 것인가. 세월의 덧없음이 바로 이런 것인가.
아니다, 세월을 어찌 덧없다 하리요. 그 어린아이가 저렇게 장부가 되어 내 앞에 서 있기 까지의 세월을 어찌 덧없다 하리요.

그는 내가 원래 서있던 자리에 와서 두리번거리더니 덤불위에 누워있는 내 몸을 발견하고 성큼 성큼 걸어와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먹구슬처럼 까맣고 커다란 그의 눈을 들어 내 몸 너머 파랗게 빛나는 소야바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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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57 - 드러눕다_ 목어내력 15]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1:18
조회수: 2009 / 추천수: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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