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9.24
['나무물고기' 73 - 한소리를 하다]

나는 쓰레기 더미로 이루어진 담 앞에 멈추어 마음을 다잡아 경건한 속마음을 불러냈다.
그리고 허리 높이로 둘러친 담 안으로 들어가 상위에 놓인 하얀 사기대접을 바라보았다.
벌써 누가 준비했는지 좌탁 대신에 놓여진 TV 모니터 위의 대접에 맑은 물이 담겨 있고
그 옆엔 붉은 녹이 덕지덕지 붙은 엽전들과 누리끼리하거나 푸른 녹이 슨 동전들 몇닙이 놓여 있었다.
저들이 말하는 한소리가 뭔지는 이제 알겠는데 막상 입 밖에 내려니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속마음을 꺼내어 하얀 대접 속에 든 맑은 물에 비쳐보였다. 대접에 반쯤 차있는 청수는 차라리 저 불쌍한 원혼들이
그들의 어두운 눈에서 짜낸 맑은 눈물들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썩어가는 이곳 소야바다에서 떠도는 영혼들의 애절함도
그저 이 한모금의 맑은 물속으로 들어왔다.

이때 청둥이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한마디 했다.

‘젠장! 내가 멋지게 할 수 있는데.... 한소린지 흰소린지 그건 내가 딱 인데!’

꽃지도 긴장되는지 집게발로 목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딱 따르르...’

나는 눈을 감고 저 대접 안에 담긴 맑은 물속에 피곤한 나의 낡은 육신을 천천히 눕혔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몸 전체에 소름이 돋았다. 내 살 속으로 차디찬 맑은 물이 스며들면서 투명해지는 듯 했다. 그 투명한 가슴 깊고 깊은 곳에서
세상사에 헝클어져 있던 여러 서글픈 인연들이 풀어졌다.
가운데는 온통 서리서리 엉켜있는 매듭이요, 이 쪽 끝자락은 썩어가는 소야바다 속 우리들 멍든 가슴에 묶여 있고
저 쪽 끝자락엔 물 밖의 곤고한 세상살이가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서리서리 엉켜있는 매듭마다 사랑과 미움에 지친 뀅한 눈구멍들과 배고파서 백태가 낀 메마른 입술들이 보였다.
애닲고 고달픈 얼굴들의 고통스러운 몸짓에 매듭이 바르르 떨었다.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내 몸 사지 오체 끄트머리에서 몰려와 명치끝에 돌돌 뭉치더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물과
서로 예민한 각을 세웠다. 갑자기 천근만근 무거운 추가 가슴에 뚝 떨어져 숨이 자지러지듯 막히며 몸이 휘청거렸다.
코도 눈도 입도 몸에 난 모든 숨구멍도 세상과 단절되었다. 내가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저쪽에 하얀 죽음의 문이 언뜻 보였다.
지금까지 고단하게 걸어온 길이지만 아무런 회한도 미련도 남아있지 않아 뒤돌아 볼 일도 없었다. 그래, 저 문으로 걸어 들어가자.
눈이 훤해지며 앞은 더욱 하얗게 밝아졌다.
그 문을 드나드는 어느 죽엄의 손이 나의 가슴을 쓸어주었던가. 그 손이 내 발 뒤꿈치를 잡았던가.
한숨을 길게 내 쉬며 꽉 붙은 나의 입이 터지듯이 벌어졌다.
무겁고 어두운 내 육신이 나의 입을 통해 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한도 끝도 없이 빠져 나왔다.

휘휴우우우, 휘휴우우. 세상엔 죽음도 여러 가지 인데 그중 가장 슬픈 죽엄이
물에 빠진 죽음이라더냐. 내가 물에 빠져 숨이 넘어 갈 때 내 식구들 모두 어디에서
배고픔에 떨고 있었느냐. 배곪고 추워서 서러운 세상에서 나를 기다리다 지친 내 자식들아.
쌀 반됫박도 안되는 내 죽엄은 이 차거운 강바닥에 오그러 붙어서 오늘 꼼짝 못하는 귀신이 되었구나 휘휴우.
그래도 나는 이 짜디 짠 바닷물이라도 실컷 배불리 마시고 죽는다만
살아남은 내 자식들은 앞으로 애비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꼬.
내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다만 너희들 온종일 배곯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이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휘휴우. 이 바다 어두운 바다 밑에서 헤매기를 십수년 백수년에
이미 살은 썩어 물이 되었고 뼈는 썩어 갯펄로 변해 지렁이 밥이 되었으니 불쌍타 이내 육신, 오뉴월 햇빛이 세상을 달굴 때나
동지섣달 쩡쩡 얼음이 얼 때나 홑이불 한 장 없이 이 어둡고 추운 물속에서 헤매기를 십수년 백수년에
아직도 헌 걸레 조각처럼 떠도는 이내 영혼이 슬프구나 슬프다  아휘휴우.
바람 불면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면 물결 치는대로 걸레쪽 같은 영혼을 보듬고
이 물 속에 갇힌지 벌써 십수년 백수년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세상
이 물속 어두운 세상에서 불귀가 되어 아무리 울어도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들려줄 소리가 없으니 서럽고도 서럽다.
아휘휴우 휘휴우 후우우....................

내 가슴이 점차로 대접안에 담긴 청수를 닮아가며 맑아졌다. 목어와 청둥이 그리고 꽃지 사이에 가득찬 어두운 바닷물도
그 투명한 눈이 열렸다. 앞 계곡을 가득 메운 하얀 사람들도 조금씩 맑아지며 서로 투명해졌다.
이제 내 입에서 빠져 나오는 나의 영혼도 한결 가볍고 맑아졌다.

여보시오 여러 성씨 망자님들. 인간이 한번 죽어지면 가신 길은 있지마는 오신 길은 없구나.
저승길이 길 같으면 오고가고 왜 못하리 저승문이 문 같으면 열고 닫고 못할까마는 저승길이 길이며 저승문이 문이더냐.
우리 인간이 백년을 산다 해도 병든 날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을 채 못살고
한번 아차 죽어지면 덩그렇게 혼백만 남아 북망산천 넋이로구나.
금동 같은 이내 몸은 어디 가고 혼백만 남아서 드는 밀물로 집을 삼고 나든 썰물에 울을 삼고 파도소리 벗을 삼아
어두운 바다 밑에 외로이 홀로 누웠으니 일가친척 많다한들 어느 일가 날 찾으며 친구벗님 많다한들 어느 뉘라 날 찾으리.
못가겠소 못가겠네 저승길이 어디라고 내가 어찌 가오리까
상제님전에 엎드려서 늙은 사람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마자 아무리 하소한들 못 면할 건 죽엄이라 어느 뉘랴 면할손가.
바람 맞아 물속에 누운 망자님들, 살 맞아 물에 버려진 영신, 양손 묶여 물속에 든 망자, 대창 맞아 물에 잠긴 영신,
칼 맞아 물에 버려진 망자, 총 맞아 물에 띄워진 영신.
여보시오 망자님들 서러워말고 잘 가시오. 이왕에 가시는 길에
천고만고 맺힌 원은 내 한소리에 풀으시고 소야바닷물에 몸을 씻고 청수로는 혼을 씻고
진 옷일랑 벗어 놓고 마른 옷 곱게 입고 맑은 넋 맑은 혼이 되어 저승국 천궁으로 가시라고
어둔 길은 밝아지고 밝은 길은 넓어지고 넓은 길은 평질되어 깊은 물에 다리 놓아 높은 하늘로 날개 달아서
부디 수이 극락 가고 천궁 가서 편히 쉬옵소서.

한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저 맨 뒤쪽부터 하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둥둥 떠오르더니 저 바다 끝 먼 곳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여기저기에서 둥 떠올라 위로 너울너울 날아올랐다.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던 청둥이가 날개를 번쩍 치켜들고 갈팡질팡 뛰어다니면서 하얀 사람들에게 외쳤다.

‘아이고, 갑자기 물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잘못하다간 병목현상이 생기겠다.
당신들끼리 서로 빨리 올라가려 하다가 엉켜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우리에겐 책임 없슴돠. 질서를 지키세요!
오늘 밤 안에 한분도 빠짐없이 모두 저승길에 오르게 되니 새치기 하지 말고 천천히 줄을 맞추어서 오르세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자! 나이와 상관없이 순서를 지켜서 먼저 죽었던 사람들부터 차례로 오르세요!
아니, 노약자를 우선 순으로 배려해야지. 질서! 질서!’

나의 몸도 가벼워졌다. 먼저 가슴을 통째로 들어낸 듯 앞과 뒤, 안과 밖, 좌와 우가 서로 훤하게 유통이 되고
눈 주위가 서늘해지면서 밝아졌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바닥까지 길고 큰 구멍이 뚦어져 하늘과 바닥이 내 몸 안에서 서로 마주보았다.
바닥에서 나의 발끝이 살풋 떨어지더니 좌우로 한두 번 기우뚱거리다가 위로 향해 몸이 둥 뜨기 시작했다.
세상살이의 질긴 끈이 몸에서 하나 둘 풀어지는 듯  몸 안에 가득 찬 헛것이다 싶은 것들이 셋 넷 빠져 나가는 듯
내 몸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목어가 급한 소리를 질렀다.

‘청둥아! 뜬다 떠! 빨리 잡아라. 빨리 잡아당겨야 한다’

청둥이가 떠오르는 나를 보면서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풀쩍 뛰어 올라 노란 주둥이로 나의 발가락을 물어채서
물갈퀴와 날개를 퍼득이며 잡아 당겼다. 목어가 옆으로 다가와서 꽃지가 한 쪽 집게발로 목어의 등지느러미를 물고
다른 집게발로 나의 발끝을 물고서 잡아 당겼다. 아, 이런! 세상사 질긴 인연의 끈이 다시 살아나서 내 발가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결국 세상사 인연의 당기는 힘이 더 강했던지 내 몸이 되돌아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까 잠깐 버렸던 사랑과 미움과 욕망의 보따리들이 하나 둘 다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청둥이가 이마에 송글송글 돋은 땀을 털어내며 악을 썼다.

‘이 왠수야! 네가 뜨기는 왜 떠!
너도 저 하얀 사람들 따라서 저승에 들어가려고 그랬냐? 모두들 저승에 든다고 시방 저놈의 저승길이 유행이나 되는거여?
그저 유행이라면 양잿물도 마다 않을 이놈의 인간들은 암튼지 날마다 유행에 목숨을 건다더니
이 인간도 역시나 유행에 약해! 약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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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73 - 한소리를 하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6:42
조회수: 2125 / 추천수: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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