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11
['나무물고기' 84 - 어둠속을 걷다]

목어가 물속도시 쪽을 향해 바라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물속도시의 문까지 가는 통로는 사람 걸음으로 계산하므로 네가 앞장을 서서 발걸음수를 잘 헤아려야 한다.
그 뒤로 청둥이가 뒤따르고 꽃지는 나의 등에 앉아서 걸음 숫자를 잘 헤아려야 하고 하얀사람은 내 뒤를 잘 따라 와야 한다.
그리고 문 앞에 도착할 때 까지 모두 눈을 꼭 감아야 하고 만약 누구라도 눈을 뜨게 되면 문은 즉시 달아나 버린다.
아무튼 내가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꼭 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 할 것!‘

내가 맨 앞장을 서고 목어가 말한 순서대로 청둥이가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올 준비를 했다.
청둥이가 뚱한 표정으로 목어에게 물었다.

‘목어는 명색이 물고기 넋이라서 눈거풀도 없을 텐데 으띃게 눈을 감지?’

‘나는 눈을 뒤집어 내 안의 텅 빈 어둠을 향하면 된다. 자! 그럼 모두 눈을 감고 걸음을 떼면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정확하게 헤아려 먼저 아흔 걸음을 저 물속도시 쪽으로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아흡 걸음, 다시 왼쪽으로 아흔 걸음,
그리고 또 왼쪽으로 아홉 걸음을 옮기고 나서 바로 정지하면 그 다음 절차는 내가 다시 말해주겠다‘

나는 출발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서 붉은 빛을 내고 있는 사발바위를 한번 더 쳐다보았다.  
바위가 미세하게 떨며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청둥이는 내 허리께에 주둥이를 꽉 붙이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목어도 육중한 몸에 긴장감이 배어있었다. 목어의 등에 앉은 꽃지도 두 눈을 등깍지와 하얀 배 사이에 깊숙이 집어넣고
이 순간이 긴장 되는지 발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목어의 바로 뒤에 서있는 하얀사람도 금빛 삼지창을 등에 꽉 맨 채
두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려 더듬거리며 출발 준비를 했다. 눈을 칭칭 감느라 너무 힘을 준 탓에 투명한 얼굴의 눈 주위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혹시 죽음이 닥치더라도 내 눈에 마지막 비치는 이 장면을 기어코 기억해 두고 싶었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다음에 눈을 꼭 감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열여섯..... 스물 셋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약간 비슬댔다. 눈을 감고 반듯하게 걷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나아가는 방향이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다 싶으면 내 걸음이 자꾸 왼쪽으로 치우치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치우친다 싶으면 나의 걸음은 자꾸만 오른쪽으로 향해 걷고 있는것 같았다.
마흔다섯... 예순 아홉... 일흔 하나... 여든 아홉, 아흔.
겨우 아흔 걸음 이었지만 멀고도 먼 길을 떠나서 어둠 속으로 구십리도 넘게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우리는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빛 한 줄기 없는 깊은 어둠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앞도 뒤도 시작도 끝도 위도 아래도 분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분간할 필요조차 없는 깊은 어둠속에 들어와 있었다.
정확하게 아흔 걸음을 걷고 나서 나는 잠깐 정지한 채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허리께에 대고 있는 청둥이의 부리가 예민하게 나의 걸음걸이를 감지하며 조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요 녀석도 분명히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신경을 내 허리께에 댄 자신의 부리에 집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맨 뒤쪽의
하얀사람은 앞으로 뻗어 올린 양 손으로 더듬거리며 여전히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왼쪽으로 돌아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넷...
마음속으로 다섯을 세며 발을 떼어 바닥에 딛기 직전에 갑자기 꼭 감은 눈이 환해지면서
바닥이 휘영청 들리더니 나의 몸이 어떤 큰 힘에 의해 던져지듯이 나뒹굴었다.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모두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재빨리 나뒹굴었던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우리가 눈을 감고 첫발을 떼기 시작한 사발바위 바로 앞이었다. 아흔 걸음을 떼어 나아갔는데도 우리는 기껏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목어가 몸을 추슬러 바로 일으키며 청둥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눈을 뜨고 말았군’

꽃지가 아직도 눈을 등깍지 아래 깊숙이 집어넣어 꼭 감은 채 집게발을 딱딱 마주치면서 말했다.

‘청둥이가 분명해!’

‘칫! 저 인간이 왼편으로 방향을 틀 때 내가 잠깐 실눈을 쬐끔 떴을 뿐이야.
도대체 어디만큼 왔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것도 양쪽 눈도 아니고 한쪽 눈만 가늘게 실눈을 떴는데....
요렇게 가늘게 실눈을 쬐끔 떴는데, 아주 쬐끔! 젠장! 그런데 이거 방금 출발했던 자리잖아. 괙괙 이거 모야?
누군가 우리를 놀리고 있는 모양이야. 분명히 우리가 아흔 걸음이나 앞으로 나아갔는데  왜 출발했던 자리에 여전히 있지? 괙괙!
혹시 목어 아저씨가 물속도시로 들어가는 문을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어. 암! 그럴수도 있지.
어제도 하루 내내 저 검은 벽을 따라 문을 찾아 나섰지만 제자리에서 맴돌았잖아?
우리는 무엇엔가 속고 있는지도 몰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청둥이는 처음엔 자신이 눈을 뜬것에 대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우리가 왜 제자리에 있는 것인지에 이야기를 돌려 대나깨나 큰소리로 마구 떠들어댔다.

‘흐흐흐 내가 귀신이지만 귀신이 곡할 노릇은 아직 한번도 구경하질 못했다.
모든 것이 청둥이가 눈을 떠버린 탓이야.
다시 한번 더 그런 실수를 하면 이 바닥을 뒤져 헌 양말 조각이라도 주워서 너의 머리에 덮어씌우고 말겠다’

‘뭐라고? 헌 양말을 내 머리에 씌우겠다고?’

‘두려운 자는 일치감치 두 눈을 꼭 감아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두운 것조차 두려워서 가장 빨리 눈을 뜨기도 한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어둠속에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겁이 많은 자는 저 물속도시에 들어갈 수 없어!’

‘뭐? 내가 겁이 많다고? 흥! 괴상망측한 삼지창이나 등에 매고 다니는 너야말로 겁쟁이지’

청둥이와 하얀사람의 언성이 서로 높아지자 목어가 말리면서 말했다.

‘사발바위가 내는 붉은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늦지 않았어.
1시간이 60분 인 이유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 있지만
하루가 24시간인 이유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새롭게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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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84 - 어둠속을 걷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9 18:04
조회수: 2079 / 추천수: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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