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5.20

['나무물고기' 23 - 올라타다]

木魚는 나를 등에 태우고 물속 도시의 어두운 외곽도로를 따라 헤엄쳐 갔다.
물속 도시가 벌써 낯이 익은 탓인지 폐허로 변한 시가지도 정겹게 다가왔다.
채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진 건물들이 어딘가 어설프고 기이하게 보였지만
그것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빌딩과 빌딩 사이 골목길 구석구석에 쌓여진 쓰레기들도 살갑게 느껴졌다.

木魚의 등 위에 올라앉아서 바라보는 도시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물속의 어둡고 짠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이젠 그 풍경들이 나의 맨몸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감싸고 있었다.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곳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와 마음과 모양새에 따라
모든 것이 이렇게도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새 색깔로 단장한 木魚 덕분에 그의 등에 올라앉은 벌거숭이 내 몸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인 듯 자랑스럽다.
이 물속에 살아있는 것은 나와 목어 둘 뿐이라는 것을 나는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이런 멋진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패션을 입었다고 해서 몸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괴물 목어의 말은
단연코 틀린 말이다.
새롭게 색을 올린 목어의 등에 올라앉은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많이 변했다.
이제 나는 물류창고 책상위의 장부에 빼꼭히 적힌 숫자 따위는 모두 잊어버렸다.
숫자와 숫자가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오늘의 운세 셈법 같은 것은
지금의 나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내 앞을 막아선 적들의 보병 숫자를 헤아리고
내 뒤를 따르는 기병숫자를 세며 금빛 영기를 들어 진격을 호령하는 장수에겐
창고에 들고나는 물건들의 숫자는 한갓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무찔러야 할 가증스러운 적이거나 혹은
불쌍하게 보이는 목숨들뿐이었다.

나는 날랜 백마를 타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저 어둠을 향해
진격하는 장수다. 나의 오른손에 쥐어 있는 긴 칼이 저 어둠의 끝에서
기다리는 적장의 가슴을 겨누며 번쩍거렸다.

잠시 후에, 높은 빌딩들의 어두운 창문마다 곧 환한 불이 켜질 것이고
이제 곧, 빌딩과 빌딩사이의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에도 큰 불을 밝힐 것이고
금방이라도, 사람들은 저 캄캄한 하늘에 축포를 쏘아 올리며 환호성을 내지를 것이다.
그리고 나의 멋진 모습을 보려고 앞 다투어 몰려나와
텅 빈 이 폐허의 거리가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꽃을 나에게 던질 것이다.
너도나도 카메라 셔터를 누를 것이고 손에 쥔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이 멋진 광경을 영상메시지로 중계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재작년 가을에 나를 흘겨보면서 눈에 흰창을 내리깔고 떠난 그 여인도
멋진 내 모습을 전봇대 뒤에 숨어서 지켜보며 후회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나를 등에 태운 백마는 울긋불긋한 상모와 안장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
나는 마치 백마를 탄 늠름한 개선장군처럼 한껏 허리를 곧게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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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23 - 올라타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6:58
조회수: 1681 / 추천수: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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